티스토리 뷰

목차


    총을 잘 쏘는 사람은 표적을 정확하게 알아본다. 그러나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에서 정말 어려운 일은 총구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독립군 안옥윤은 친일파 강인국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그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시정부의 신임을 받던 염석진은 일본에 정보를 팔고,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던 하와이 피스톨은 오히려 독립군을 돕는다. 명함과 혈연, 제복만으로 어느 편인지 알 수 없어진다. 《암살》은 적을 겨누는 이야기인 동시에, 누가 자기 편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다시 판단하는 영화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지휘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 사업가 강인국을 암살할 작전을 준비한다.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이 임무에 투입되지만, 이들을 모은 염석진(이정재)이 작전 내용을 밀고한다.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까지 개입하면서 계획은 예상 밖으로 움직인다.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누구의 사격이 더 정확한가보다 누가 어떤 순간 방아쇠를 내려놓거나 다시 겨누는가에 있다.

    ※ 인물의 정체와 마지막 처단 장면까지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암살

    1. 안옥윤의 두 얼굴 : 혈연보다 어려운 선택은 무엇인가?

    안옥윤은 친일파 강인국의 딸이지만 그의 집안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해되고 쌍둥이 자매가 갈라진 뒤, 한 아이는 독립군 저격수가 되고 다른 아이 미츠코는 부유한 친일파 집안의 딸로 살아간다. 전지현은 한 얼굴을 지닌 두 인물을 연기하지만 두 사람이 다르게 살아온 시간을 외모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같은 얼굴이라도 누군가는 총을 손질하고 누군가는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한다. 영화는 태어날 때 정해진 혈통이 이후의 삶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흔든다.

    더 잔인한 반전은 강인국이 미츠코를 안옥윤으로 오인해 죽이는 사건이다. 나라를 배신하고 가족까지 자신의 이익에 맞춰 처리하는 사람에게 딸의 얼굴조차 안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두 딸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두 삶의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의 시선이 충돌한다. 이 장면에서 혈연은 보호의 약속이 아니라 권력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정할 수 있는 관계로 드러난다.

    이후 안옥윤은 미츠코의 신분으로 결혼식장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한다. 흰 드레스와 저격수의 몸이 겹치는 장면은 단순한 변장술이 아니다. 여성을 결혼을 통해 거래 가능한 존재로 여기는 권력의 행사장에, 자신이 무엇을 할지 스스로 결정한 여성이 들어서는 장면이다. 다만 쌍둥이라는 우연과 완벽한 신분 위장은 현실적인 작전보다 장르영화의 극적인 장치에 가깝다. 바로 그 과장 덕분에 서로 다른 두 삶의 대비가 또렷해진다.

    2. 염석진의 재판 : 해방된 나라에서 왜 배신자는 살아남는가?

    염석진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요원이다. 그가 일본의 밀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충격적인 이유는 처음부터 낯선 적이어서가 아니다. 독립운동의 언어와 절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동지들이 자신을 믿도록 만드는 방법도 알기 때문이다. 그는 1911년의 항일 활동을 자신의 증명서처럼 사용하면서 이후의 변절을 감춘다. 한때 올바른 일을 했다는 사실이 평생 올바른 사람이라는 보증이 될 수는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과거의 명성을 쉽게 의심하지 못한다.

    영화가 1949년으로 건너뛰는 선택은 그래서 중요하다. 해방 뒤 경찰 고위직이 된 염석진은 반민족행위 처벌을 위한 재판에서 자신의 독립운동 경력과 몸의 상처를 내세운다. 그를 고발할 증인은 사라지고 그는 책임을 피한다. 그의 몸에 남은 흔적은 분명 과거의 일부이지만, 그 뒤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상처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누가 그 상처의 이야기를 독점하는지 물어야 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에 설치되었으나 1949년 정치적 압박과 방해 속에서 활동이 좌절되었다. 다만 염석진의 구체적인 재판과 최후는 영화가 만든 서사다. 역사적 제도의 좌절을 가상 인물의 운명으로 압축한 장면을 사실 기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해방이 곧바로 과거의 권력 관계를 청산해 주지는 않는다는 불편한 단절이다.

    3. 하와이 피스톨의 선택 : 돈을 받는 손이 왜 동지를 구할까?

    하와이 피스톨은 처음에 돈을 받고 암살단을 제거하라는 의뢰를 받는다. 임시정부 요원의 명함보다 계약금을 더 신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이 왜 독립군을 죽이려 하는지 알게 되면서 계획에서 벗어난다. 그가 안옥윤을 살리고 결혼식 작전을 돕는 과정은 애국심을 외치는 긴 연설 대신 행동의 방향이 달라지는 모습으로 전달된다.

    그의 선택을 간단한 개과천선으로 읽으면 놓치는 점이 있다. 그는 여전히 살인 기술을 지녔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의 흔적도 버릴 수 없다. 특히 친일파 강인국을 앞에 두고 안옥윤이 주저할 때 대신 총을 쏘는 행동에는 보호와 폭력이 동시에 놓인다.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는 부담을 그녀에게 남기지 않으려는 선택으로 읽을 수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 살인을 대신한다는 일이 모든 윤리적 문제를 지우지는 않는다.

    하정우와 오달수가 연기한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의 관계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도 농담을 놓지 않는다. 이 가벼움이 비극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도 계속 살아가고 싶은 평범한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서 안옥윤에게 남는 것은 성공한 작전의 기록만이 아니라 함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의 이름이다.

    4. 속사포와 황덕삼 : 거창한 역사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속사포와 황덕삼은 각기 다른 전문 기술로 작전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국가의 미래를 길게 설교할 시간도, 살아남아 공을 인정받을 기회도 충분하지 않다. 첫 시도가 실패하고 동료가 쓰러져도 남은 사람은 다시 계획을 이어 가야 한다. 193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화려하게 재현한 화면 속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이 역사책에 얼마나 남을지는 불확실하다.

    조진웅의 속사포는 거친 말과 행동으로 팀에 생기를 불어넣고, 최덕문의 황덕삼은 폭발물을 다루는 전문성으로 작전에 현실감을 준다. 둘의 존재 덕분에 독립운동은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서로의 일을 맡아야 가능한 협업으로 보인다. 영화가 말하는 독립운동의 무게는 승리의 순간보다, 그 순간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이 남긴 빈자리에 있다.

    하지만 화려한 총격과 인물들의 희생이 빠르게 이어지면서 개인들의 삶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이들을 모두 영웅이라고 부르는 말은 정당한 존중일 수 있지만, 그 말이 각자의 사연을 모른 채 지나가도 좋다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경성의 결혼식 : 아름다운 도시는 누구의 안전을 위해 빛나는가?

    《암살》의 경성은 어둡고 초라한 식민지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백화점과 자동차, 서양식 의상과 성대한 연회가 근대 도시의 화려함을 만든다. 특히 미츠코의 결혼식은 빛나는 의상과 정돈된 동선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공간은 강인국과 일본군 권력자의 관계를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화려함이 곧 자유의 증거는 아닌 셈이다.

    최동훈 감독은 저격과 폭발, 추격을 이 공간 안에 한꺼번에 밀어 넣는다. 관객은 총격의 박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누가 저런 파티를 열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같은 도시에서 누군가는 드레스를 고르고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숨긴 채 총을 운반해야 한다. 근대적인 도시의 풍경이 모두에게 같은 삶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는 대조다.

    다만 액션의 통쾌함은 때로 식민지 폭력의 지속적인 피해를 한 번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마무리한 듯한 인상을 준다. 화려한 결혼식의 붕괴는 상징적인 승리이지만 그것만으로 침략과 협력의 구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가 1949년으로 다시 이동하는 후반부가 더욱 필요하다.

    6. 마지막 처단 : 정의가 늦게 도착했을 때 남는 불편함

    1949년 염석진은 재판을 빠져나오지만 안옥윤과 살아남은 동지 명우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초반의 암살 작전이 일본군 지휘관과 친일파 사업가를 겨누었다면 마지막 총구는 독립운동의 내부를 배신한 사람에게 향한다. 제목인 '암살'이 한 번의 작전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영화는 침략자를 제거하는 이야기에서, 해방 후에도 계속된 배신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로 이동한다.

    이 장면은 강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반민특위의 실패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끝내 처벌받지 않은 인물을 응징하는 상상적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처단을 실제 사회의 정의 실현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올바른 책임 추궁에는 증거와 절차, 제도의 작동이 필요하며, 그런 절차가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역사적 문제다. 영화의 복수는 그 문제를 감정적으로 마감하지만 제도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암살》을 다시 볼 때 마지막 총성이 아니라 그 뒤에 남은 침묵을 생각할 만하다. 안옥윤과 동지들은 누가 배신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지만, 사회는 한동안 그 사람의 독립운동 경력을 더 크게 보았다. 국가가 기억할 인물을 정하는 일이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여운이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름은 쉽게 지워지고, 그들을 팔아넘긴 사람의 이력은 오래 남을 수 있다. 우리가 후세에 해야 할 일은 멋진 총격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가 무엇을 했는지 끝까지 구분하는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