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살게 해 준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2014)는 칠순의 오말순(나문희)이 스무 살 오두리(심은경)가 되는 기발한 사건으로 이 질문을 꺼낸다. 그러나 영화에서 더 이상한 일은 얼굴이 젊어지는 기적 자체가 아니다. 가족에게 잔소리 많은 할머니로 취급받던 사람이 낯선 젊은 여성의 모습이 되자 비로소 노래를 들어 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말순은 젊음을 되찾아서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방식이 바뀌면서 원래 품고 있던 꿈을 보여 줄 기회를 얻는다.오래전 홀로 아들을 키웠던 말순은 이제 잘나가는 아들 반현철(성동일)을 자랑하며 산다. 하지만 며느리와의 갈등 끝에 요양원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듣고 집 밖을 헤매다가 ..
영화 《검사외전》(2016)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검사가 수갑을 차는 순간보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법을 더 잘 움직이게 되는 순간이다. 이일형 감독은 거친 수사로 악명 높은 검사 변재욱(황정민)과 입만 열면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사기꾼 한치원(강동원)을 한편으로 묶는다. 한쪽은 법률을 알지만 자유가 없고, 다른 쪽은 자유를 얻지만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둘이 손을 잡자 진실은 정직한 고백보다 계산된 연극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정의가 승리하는가가 아니라, 정의를 되찾는 과정에서 어떤 거짓말과 폭력이 용인되는가다.변재욱은 조사받던 피의자 이진석이 사망하면서 살인 누명을 쓰고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수감된 지 5년 만에 그 사건의 배경을 아는 한치원을 만나고..
스키점프 선수는 누구보다 멀리 날아가지만, 착지할 장소를 미리 정해 놓고 출발한다.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2009)는 그 짧은 비행을 통해 정작 돌아갈 곳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미국으로 입양된 뒤 친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온 밥, 생계와 병역 문제를 안고 있는 선수들, 팀의 존속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코치가 스키점프 대표팀을 이룬다. 처음부터 태극마크를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뭉친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함께 날아오르는 과정은 더욱 흥미롭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이름에 어떤 의미를 채워 넣는가가 이 영화의 중심이다.영화는 1996년 무주에서 팀이 꾸려지고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을 향하는 흐름을..
전쟁영화에서 장군의 명령은 대개 함대 전체를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에서는 이순신(최민식)이 앞으로 나아갈 때 다른 배들이 따라오지 못한다. 바다 위에서 가장 외로워 보이는 사람은 명령을 받는 병사가 아니라 명령을 내려야 하는 지휘관이다. 영화가 그리는 명량해전의 핵심은 무모할 만큼 용감한 장군의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다. 자신의 명령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그 명령을 함께 감당할 만한 선택으로 바꿀 것인가에 있다.1597년 칠천량 패전 이후 조선 수군은 궤멸 직전이다. 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전선을 다시 세울 시간도, 싸움을 피할 여유도 없다. 영화는 수적 열세를 과장된 전투 장면으로 보여주면서도, 병사와 백성이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
열차의 문은 안과 밖을 구분한다. 평소에는 승객이 오르내리는 통로이지만,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2016)에서는 누구를 사람으로 인정할 것인지 결정하는 경계가 된다. 감염자가 몰려오면 문을 닫는 행동은 당연한 생존 전략이다. 그런데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을 두고도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좀비를 막기 위한 장치가 다른 승객을 버리는 도구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누가 끝까지 살아남는가보다, 살아남기 위해 누구를 먼저 사람의 범위에서 지워 버리는가에 있다.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딸 수안(김수안)을 데리고 부산행 KTX에 오른다. 임신한 성경(정유미)과 남편 상화(마동석), 회사 임원 용석(김의성)도 같은 열차에 탄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015)은 재벌 3세와 형사의 대결을 그린 통쾌한 범죄 액션이다. 그러나 영화를 움직이는 최초의 질문은 누가 더 주먹을 잘 쓰는가가 아니다. 밀린 임금을 달라는 노동자의 요구가 어떻게 거대한 범죄의 출발점이 되는가다. 서도철(황정민)은 강력사건을 해결하던 형사이고, 조태오(유아인)는 자신의 행동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믿는 재벌가의 아들이다. 두 사람이 충돌하는 순간 영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계산법을 보여준다. 한쪽은 사람의 사정을 따지고, 다른 한쪽은 그 사람을 얼마에 처리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한다. 《베테랑》의 싸움은 선한 개인과 악한 개인의 대결이면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돈으로 계산하려는 태도에 대한 저항이다.영화는 황정민의 거친 유머, 유아인의 오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