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죽은 사람을 숨기기 위한 장소일까, 남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일까. 장재현 감독의 《파묘》(2024)는 이 질문을 묘를 파헤치는 노동에서 시작한다. 미국에 사는 부유한 집안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 풍수사 상덕(최민식), 장의사 영근(유해진)은 조상의 묘를 옮기러 산에 오른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기술로 죽은 사람을 다루지만, 정작 묘에서 나온 것은 한 집안의 불행을 넘어서는 과거다. 영화가 기묘한 까닭은 귀신을 땅속에서 끄집어내서만이 아니다. 지워 버린 줄 알았던 일을 누군가 계속 묻어 두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파묘》는 전반부의 원혼 이야기와 후반부의 일본 무사 형상을 한 존재를 의도적으로 다르게 보여준다. 익숙한 퇴마극에서 출발해 땅..
택시에는 미터기가 있다. 목적지까지 얼마를 달렸는지 계산하고, 손님이 요금을 내면 운전사는 다음 일을 찾는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2017)는 이 평범한 거래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을 보여준다.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은 독일 기자 피터,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를 광주까지 데려다주면 1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운전대를 잡는다. 밀린 집세와 어린 딸을 걱정하는 그에게 광주는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하루에 끝낼 수 있는 먼 거리의 일거리다.그런데 도착한 도시에서는 길을 막은 군인, 다친 시민, 밖으로 전해지지 않는 소식이 기다린다. 만섭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돈을 받고 서울로 돌아가려 하지만, 누군가를 태워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일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세상에..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3)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적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 충성을 증명해 온 조직이 어느 날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순간이다. 북한 공작원 표종성(하정우)은 정보망에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이른바 '고스트'다. 적에게는 잡히지 않는 것이 능력이지만, 자기편에게는 언제든 기록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역설을 남북 첩보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베를린》의 액션은 누가 더 강한가를 겨루는 싸움이면서, 동시에 누가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할 권력을 가졌는가를 묻는 싸움이다.남한 정보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무기 거래 현장에서 표종성을 발견하고 그 정체를 추적한다. 북한에서 파견된 동명수(류승범)는 표종성의 아내이자 대사관 통역관인 련정..
라디오 진행자는 매일 낯선 사람의 사연을 읽는다. 청취자의 고민에 조언하고 때로는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가 자신의 집 문 앞에 나타나면 어떨까? 강형철 감독의 《과속스캔들》(2008)은 이 단순한 질문으로 가족 코미디를 시작한다. 한때 아이돌 스타였던 남현수(차태현)는 라디오에서 미혼모의 사연을 소개하며 아버지를 만나 보라고 격려한다. 그런데 그 청취자 황정남(박보영)이 아들 황기동(왕석현)을 데리고 찾아와 자신이 현수의 딸이라고 주장한다.웃음의 출발점은 서른 중반의 남자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영화가 더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던 사람이 자기 앞에 선 가족의 이야기는 왜 듣지 않으려 하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면 방송..
전쟁영화에서 활은 대개 적을 쓰러뜨리는 도구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2011)은 활을 쏘는 순간보다 화살이 지나갈 길을 찾는 시간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주인공 남이(박해일)는 조선이 청군에게 밀리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가 좇는 것은 포로로 끌려간 여동생 자인(문채원)이다. 거대한 전쟁을 한 가족의 동선으로 좁힌 선택 덕분에 관객은 승패보다 한 사람의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좋은 궁수란 멀리 있는 적을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돌아갈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영화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기록영화는 아니다. 인조반정 때 아버지를 잃은 남이가 십여 년 뒤 청의 정예부대와 맞서는 이야기는 창작된 인..
영화 《사도》(2015)의 결말은 모두 알고 있다.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사도세자는 여드레 만에 죽는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이미 결말이 알려진 사건을 미스터리처럼 숨기지 않는다. 대신 사도가 갇힌 날들을 따라가면서 그가 사랑받던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과정을 교차해 보여준다. 이 영화의 질문은 누가 그를 죽였느냐가 아니다. 왕실이라는 집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결정이 어떻게 질서를 지키는 방법으로 둔갑했느냐에 있다.송강호가 영조를, 유아인이 사도세자를 연기한다. 두 사람의 갈등을 단순히 엄격한 부모와 반항하는 자식으로 읽으면 놓치는 것이 많다. 영조의 말은 곧 왕의 명령이고, 사도의 실수는 개인적인 실패를 넘어 국가의 불안으로 해석된다.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는 장소여야 할 때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