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2024)는 전편처럼 서도철(황정민)이 악인을 붙잡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를 악인이라고 부를 것인지부터 복잡하다. 한 교수가 살해되고 과거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연달아 죽자, 인터넷에서는 정체불명의 응징자 '해치'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법의 처벌이 부족했다고 느낀 사람들이 그의 폭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형사인 서도철은 그를 막아야 하지만, 관객 역시 피해자들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쉽게 환호를 거두지 못한다. 이 영화의 불편한 출발점은 악인을 벌한다는 목표가 같아 보일 때조차, 범인을 체포하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서도철의 강력범죄수사대에는 유능한 신참 박선우(정해인)가 합류한다. 온라인에서 격투 실력으로 유명해진 그는 ..
누군가와 협력한다는 말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일까. 김성훈 감독의 《공조》(2017)는 그 당연해 보이는 전제를 시작부터 무너뜨린다.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은 아내와 동료를 죽인 차기성(김주혁)을 쫓고, 남한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철령을 도우라는 말과 동시에 그를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서로 다른 임무를 감춘 두 사람이 같은 자동차에 앉아 서울을 누빈다. 이 영화의 진짜 수사는 범인을 찾는 일과 함께, 눈앞의 동료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차기성 일당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작용 동판을 빼앗아 남한으로 달아나자 북한은 비공식 공조수사를 요청한다. 제한된 시간은 사흘이다. 철령에게는 복수와 임무가, 진태에게는 복직의 기회와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다. 두 형사의 차이를 단순히 남..
사람의 얼굴을 보고 미래를 알아낼 수 있다면 역사의 비극도 막을 수 있을까.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은 조선 최고의 관상가 내경(송강호)을 1453년 계유정난의 한가운데 세운다. 내경은 사람의 욕망과 위험을 얼굴에서 읽어내는 데 뛰어나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키는 정변을 막는 데는 실패한다.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표정을 알아보는 일과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관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미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위험이 다가오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막을 힘이 없는 사람이다.몰락한 양반 출신 내경은 처남 팽헌(조정석), 아들 진형(이종석)과 산속에서 살다가 기방을 운영하는 연홍(김혜수)의 제안으로 한양에 들어온다. 관상 솜씨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는 앞칸으로 갈수록 삶이 나아지는 이상한 세계를 보여준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앞칸의 사람들은 수족관과 교실, 사우나와 클럽을 누린다. 그러니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엔진을 향해 진격할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를 응원한다. 그런데 여행의 끝에서 그는 불평등한 질서를 뒤집으려던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그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의 무서운 질문은 누가 열차의 맨 앞에 앉을 자격이 있느냐가 아니라, 왜 모두가 같은 열차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가에 있다.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려던 냉각 물질 살포가 새로운 빙하기를 초래한 뒤, 인류의 생존자들은 윌포드(에드 해리스)의 열차에서 17년째 살아간다. 커티스는 에드가(제이미 벨),..
취업 면접에서 인정받지 못한 능력이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2019)는 대학 산악 동아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졸업 후 취업에 번번이 실패한 용남(조정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 모인 가족들은 용남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미래를 답답해한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유독가스가 도시를 뒤덮자 가족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던 철봉 운동과 암벽등반 경험은 결정적인 탈출 기술이 된다. 이 영화의 반전은 백수가 갑자기 특별한 영웅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원래 있던 능력을 사회가 이제야 알아보게 된다는 데 있다.용남은 잔치 장소인 구름정원에서 대학 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를 만난다. 의주는 그곳의 직원으로 일하지만 직장에서는 마땅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 유독가스가 밀려오..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2013)은 성공한 변호사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변화를 처음 움직인 것은 거창한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한 그릇의 국밥이었다. 돈이 없던 시절 따뜻한 밥을 내어 준 사람의 아들이 억울하게 갇혔다는 소식 앞에서 송우석(송강호)은 자신의 성공을 잠시 멈춘다. 법을 돈 버는 기술로 활용하던 사람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선한 사람의 탄생보다, 자신을 살려 준 타인의 호의를 뒤늦게 사회적 책임으로 갚으려는 사람의 변화를 그린다.1980년대 초 부산. 고졸 출신 변호사 송우석은 부동산 등기와 세무 업무로 부를 쌓고 대기업의 제안까지 받는다. 어느 날 단골 국밥집 주인 순애(김영애)의 아들 진우(임시완)가 국가보안법 사건에..